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벨 2세 (문단 편집) === 카를로스 전쟁 === '''[[포르투갈 내전]]의 [[스핀오프]]'''[* 농담이 아니라 전쟁의 명분이 둘 다 조카딸과 숙부 사이의 왕위 계승 문제였고, 실질적인 이유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충돌인 것까지 판박이다.] 어린 이사벨이 즉위하자, 페르난도 7세의 남동생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조카딸의 즉위는 무효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살리카법]] 대로라면 자신에게 왕위계승 우선권이 있기 때문. 카를로스는 '카를로스 5세'를 자칭하며 자기가 스페인의 국왕이라 선언했고, 이로 인해 스페인은 '카를로스 전쟁'이라 불리는 7년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사실 스페인은 프랑크 왕국계가 아니라 살리카법이 적용되지 않았으나 보르본 왕조가 들어서면서 생겨나게 되었다.] [[카를리스타|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세력]]은 기존의 기득권층인 [[교회]]와 [[귀족]]이 중심인 보수파였고, 이사벨 2세를 지지하는 세력은 의회의 주요 정당들이 중심인 진보파였는데 이는 여왕의 즉위가 페르난도 7세의 반동 전제군주정을 몰아내고 입헌주의에 근거한 의회정부를 재건할 호기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내전 초기에는 반군이 승리할 것처럼 보였으나 의회가 교회의 재산을 국고로 몰수하는 강경책을 써서 카를로스파의 돈줄을 끊고, 정부군의 활약과 반군의 내분 등으로 무너지면서 1839년 이사벨 2세의 여왕 즉위가 확고하게 굳어졌다. 참고로 카를로스파는 계속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일으켰지만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집권한 후 차기 스페인 왕위를 여왕의 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잇도록 함으로써 한 세기 넘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게다가 카를로스파의 직계는 남계후손이 끊기면서 1936년에 단절되었기 때문에 [[살리카법]]으로 따지면 다음 계승자는 카를로스의 동생인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와 이사벨 2세의 손자인 [[알폰소 13세]]인데, 이렇게 되면 카를로스파 입장에서는 '''이사벨 2세의 후손을 인정하는 꼴'''이 돼버리므로 카를로스파는 부르봉파르마계에서 후손을 추대했으나, 이는 살리카법을 바탕으로 한 카를로스파의 주장에 근본적인 모순이 된다.(이 때문에 카를리스타는 알폰소 12세가 이사벨 2세의 사생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스페인 사람들은 [[아마데오 1세]]의 상황에서 보듯이 이탈리아 출신 왕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